홍콩의 한인회 약사

구분

내용

형성

한국인이 홍콩에 살게 된 것은 주로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중국에서 살던 교포들 중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홍콩으로 나온 사람들이나, 혹은 중국 내륙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격렬해짐에 따라 홍콩으로 피난을 오게된 사람들이 머무르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들 중 일부분은 귀국하였으나 약 40여 세대가 남아서 사업활동을 하면서 교민사회가 시작되었다.

1940년대

1949년 3월 1일 홍콩한국교민회가 탄생하였고 같은 해 5월 1일 처음으로 우리나라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1950년대

1950년대에는 홍콩이 지금처럼 발전되지 못한 작은 항구 도시였으며, 우리나라와의 교통수단으로는 선박으로 7~8일 걸렸다. 또 항공편으로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일본을 경유, 10시간이나 결렸다.  직접 오는 특별기나 쌍발군용 수송기로도 8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에 내왕하는 인사라고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극소수의 인사들이었으며 우리나라가 처음 참가한 런던 올림픽(1948년) 한국 선수단 일행이 홍콩을 경유한 것이 가장 큰 손님이었다. 1953년 한국은행 홍콩지점이 설치되고 그 뒤 해운공사도 진출했다.     

1960년대

    1960녀대 들어 5.16 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지금의 Causeway Bay에 교민회관을 마련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5개 무역상사의 지사가 진출했고 외환은행이 개점하여 이들의 무역관계를 뒷받침해 주었다. 이 무렵의 교민인구는 250명 정도였으며 교포2세들의 한글교육을 위하여 홍콩한국학원(토요학교)이 시작되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현 학생수 500여명) 1969년 정부의 수출증대정책의 일환으로 Korea Center(무역협회)가 설립되어 우리 상품의 선전 및 각 상사 진출의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교민 인구는 점차 늘어났다.

1970년대

70~80년대에도 우리나라의 경제 개발로 많은 비약을 함에 따라 홍콩한인상공회가 조직되었으며, 많은 주재상사가 진출했다. 또 이곳에서 현지 퇴직을 하여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져 한인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1979년에는 처음으로 본국의 전국체전에 홍콩 선수단을 파견하여 현재까지 계속 참가하면서 해외 동포들 중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1980년대

80~90년대 이르러서는 우리 경제의 경이적인 발전으로 많은 금융기관과 상사들의 진출로 한 때 한인수가 8,000명이 넘을 때도 있었으나 IMF를 겪는 등 어려운 시대를 맞아 점차 감소되고 현재는 약 6,000명 정도로 집계된다. 1988년 소규모의 정규 학교인 홍콩한국하교를 설립, 운영해 오다가 재홍콩 한인 전체가 합심하여 거액의 기금을 마련하였다. 홍콩정청(교사건립대지) 및 우리장부(건립비 1/2)의 협조를 얻어 홍콩 Sai Wan Ho의 1,200평 대지에 홍콩한국구제학교(KIS)를 건축하기 시작(1992년)하여 1994년 2월 25일에 준공식을 올리고 한국어, 영어 과정의 2개 과정을 두어 외국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여 현재 유치원부터 고등부까지 운영되고 있다.

1990년대

1999년 11월 23일 홍콩한인회는 전체 교민이 모인 가운데 창설 50주년 기념식 및 자축연을 가져 그 동안 선배 교포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지나온 발자국을 뒤돌아 보면서 깊은 감회를 느끼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4대 수출시장인 이 홍콩에서 더욱 분발하여 좋은 성과를 올리고 명실공히 해외 교민사회의 모범이 되자고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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